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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예정

이응노미술관 예정전시 내용을 소개합니다.
2019 아트랩대전

 

인터스페이스(Interspace)를 걷다.

2019 김태훈 개인전에 부쳐

   

민희정 (미술이론)

 

 

21세기의 디오라마

디오라마(diorama)19세기 원예예술, 회화적 미학, 혹은 오페라 무대연출의 계보에 속하는 영역으로부터 출발했다. 오페라와 대중연극을 위한 무대의 장치가이며 극장 운영자인 다게르(L. Daguerre)에 의해 광학적 기술이 더해지면서 가상의 세계와 관객이 위치한 현실의 공간이 연결되었다. 사진발명가로 널리 알려진 다게르는 자신이 운영하는 극장에 초대형 걸개그림의 현실감을 주기 위해 조명을 비추고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해 원근감 있는 회화장치를 개발했으며, 관객이 가상의 공간에 몰입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특수한 장치들을 추가해 나갔다. 즉 그는 디오라마관을 현존의 시간을 지우는 마법의 공간으로 만들려 했다. 예술의 역사는 조각과 같은 물리적 공간에 대한 비교적 원초적이고 물질적인 예술에서 가상공간을 재현하는 근대적 회화로, 그리고 가상을 현실화 하는 비물질적인 영상으로 이동해 왔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는 가상의 세계에 몰입하기 위해 여러 장치들을 활용한 다게르처럼 시간과 공간을 구성한다. 회화라는 가상의 창을 향했던 근대 예술은 철저히 시간과 공간을 지웠다. 이후 등장한 영화는 빛을 죽임으로써 현실의 공간을 지워 가상의 공간에 도달했으며, 그리고 20세기의 테크놀로지는 가상현실(VR)을 통해 현실의 공간을 지울 뿐 아니라 공간을 연결하는 이동의 시간마저 지웠다. 이처럼 첨단기술로 이동이 필요 없는 시대가 눈앞에 펼쳐진 이때, 우리는 미술관에서 작가 김태훈을 만난다. 그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지워야 하는 걸까?

시간과 공간에 관한 문제는 예술가들의 오랜 탐색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테크놀로지의 혁신으로 시간과 공간에 대한 문제는 급격히 달라졌다. 이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은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게 되었고, 적어도 예술의 영역에서, 두 개념은 구성에 따른 설정의 문제가 되었다. 작품 <낮섬에 관한 기억; 걷기>(2017)에서 김태훈은 가상 속 등장했던 대상을 현실의 공간으로 불러들여 이질적인 두 공간을 연결하는, 즉 과거 디오라마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물질적인 장치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디오라마의 장치들이 가상세계의 몰입을 위해 놓인 것이었다면, 김태훈의 장치들은 그 때의 기억그 때를 재현한 현실사이의 어긋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간, 공간, 그리고 걷기

김태훈은 문득 자신의 창작 동력 가운데 하나가 걷기라고 생각했다. 걷고, 서성이고, 맴맴 돌기도 하면서 사유를 개진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걸으며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추적하는 동안, 스스로가 현실 속 자신의 움직임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자신 걸어 온 길에 대한 기억 또한 희미했다. 이후 그는 우리의 의식이 현실공간을 떠나 가상의 공간에 몰입한 사이 모래처럼 사라지는 많은 입자들에 대해 숙고하게 되었다. 그의 <걷기> 시리즈는 이로부터 출발한 작업이다. 그가 처음 자신의 사유에 몰입해 있던 시간의 움직임과 시선, 스스로도 잊고 있었던 신체적 반응을 담은 영상을 통해 관객과 공유하고자 했다. 그러나 어떠한 테크놀로지나 시공간적 설정을 만든다 해도 그 때의 자신에게 관객이 온전히 공감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몰입을 위한 설정이나 테크놀로지에 대한 추적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그는 <걷기> 작업을 통해 움직이는 것’, 혹은 이동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우리의 관념을 해체시킴과 동시에 걷기로부터 소멸되는 것을 살펴보고자 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예술작품을 위한 창작을 위해 몰두하는 시간동안 자신의 외부에 있는 다양한 사유와 시선, 감각과 분위기를 잃어버리지 않게 이중의 감각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선택했다.

 

관계적 공간, 인터스페이스

새롭게 발표되는 김태훈의 작품 <기억의 집: 조각모음>(2019)3채널 화면은 매우 안정된 풍경의 연속이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 배경화면에 나올 법한 평온함과 익숙함을 제공한다. 또한 그는 무심코 지나쳤을 법한 감각을 추적하며 소리에 집중하고 바람, 햇빛, 습도와 같은 풍경의 조건들이 복합적으로 만들어 내는 심상을 담담하게 재현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그곳의 냄새가 전해질 법한 아련함으로 관객을 자극한다. 작가는 인상주의 화가의 풍경을 차용한 것 같은 장면의 연속들을 무심히 흘려보내며 이미지 범람의 시대의 시각적 자극을 모두 제거하고 풍경과 개인으로서의 관객만을 공간에 남긴다. 이렇게 그를 만난 관객은 시간과 공간 어느 하나도 지우지 않음으로써, 이 공간에서 관객은 현실과 가상을 동시에 볼 수 있으며 독립적인 사유가 가능하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관객이 몰입하도록 공간을 밀폐하지 않으며, 또한 관객 스스로가 조작해야만 영상이 변화되는 참여의 부담감을 강요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환원된 결과이다. 그의 작업에 나타나는 공통된 구조는 영상이라는 가상의 공간과 관객의 공간을 분리하고 공간의 사이를 조금 벌림으로써 이러한 이중구조에서 관객 스스로의 경험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틈이 바로 인터스페이스다. 그는 작품의 핵심을 인터스페이스를 어떻게 구성하고 관객과 만나는 시간에 대한 계획을 설정하는 것에 둔다. 즉 그의 관심은 가상에 몰입하고 다시 현실공간으로 돌아오는 경계적 공간, 관객의 고유의 공간인 인터스페이스를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걷기라는 방식을 통해 넘나들도록 함으로써 그 관계성을 연결해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시간이 비물질적, 영적 가치와 연결된다면 공간은 물질과 신체의 영역이 연결되는 모든 것들이 놓인다. 그의 욕심은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모으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적 요소를 혼합하는 일은 설정에 따라 얼마든지 가변적 일 수 있으나 자칫 작가의 의도가 균형을 잃어버리거나 관객에 의해 왜곡되어 버릴 수 도 있다. 오늘의 예술의 주체는 관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지금껏 예술이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킨 확장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는 믿음으로 부터 틈의 공간, 인터스페이스에 접속을 시도한다. 그는 하나의 완벽한 소통을 꿈꾸지 않으며, 서로의 공간을 넘나드는 대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방식은 작가의 입장에서 작품은 영상과 영상에 접속하는 다양한 관객의 기억 뿐 아니라 관객의 습관이나 성격, 생각, 행동까지 모두 포함해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감각들을 모아서 하나의 예술적 데이터를 만드는 것이며, 반대로 관객은 작품에 접속한 관객이 필요한 내용을 필요한 만큼의 양 만큼 가져가는 방식이다. 그것은 하나의 정보가 될 수 있으며 힐링이나 추억, 혹은 다양한 의미의 전환이 가능하다. 즉 관객 개개인이 자신의 특유의 방식대로 작가의 작업을 환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처럼 자유로운 관계를 통해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관객에게 자신의 시선을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로써 관객은 걷기라는 상징적 의식을 통해 공간과 시간을 모두 기억하는 작품의 열쇠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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