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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아트랩대전 11월의 작가 : 백요섭

시간의 두께, 감각의 역사

 

이슬비미술평론가

 

백요섭의 회화는 어떤 대상을 그렸는지 구체적으로 감지하기 어렵다. 다양한 색면이 겹겹이 중첩되어 어떤 색감이라 표현하기도 힘들다. 작가는 특정한 이미지를 배제하고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고 긁어내고 다시 쌓아 올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다. 일상의 삶에서 쉽게 지워질 수 있는 감각들을 일기처럼 기록한 것인데, 그것은 목적 없이 방황하는 사소한 기억일 수도 자신의 주변을 감싸 안은 따뜻한 공기의 진동일 수도 있다. 작가는 유년 시절 기억이 담긴 오래된 장소를 방문하고 마주한 감정을 채집하기도 한다. 다양한 색감과 독특한 질감으로 포착해낸 기억과 흔적의 실험인 것이다.

재현이라는 미술의 기능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추상 회화가 현대미술사에서 전성기를 누린 시대가 있었다. 과거의 추상회화가 서사에 대한 부정이었다면 동시대 미술에서 추상의 외형을 지닌 회화는 구체적인 감각을 동력 삼아 서사의 복원을 추구한다. 백요섭의 작업 역시 삶의 정서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이와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젊은 작가들이 추상의 외형을 디지털 세대의 감수성을 선보이기 위해 소환했다면, 백요섭의 묵직한 화면은 오히려 앞선 세대의 회화적 표면과 닮아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과거의 추상이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세계에 가깝다면 백요섭의 회화는 구체적인 현실이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작가는 일상에서 스쳐 지나간 순간을 생생한 이미지로 담아낸다. 하지만 그의 작업이 다소 막연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맛, 냄새, 소리, 혹은 어떤 감정 등 작가가 느낀 구체적인 감각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는지에 대해 어떠한 암시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겹겹이 쌓인 화면은 긁어진 흔적을 통해 겨우 틈을 내비친다.

만일 그의 회화가 하나의 겹이었다면 그가 느꼈을 특정한 감각의 단면은 쉽게 공유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감각의 박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회화는 하나의 표면이 아니라 일종의 구축물에 가깝다. 전자가 일상의 단면을 포착한 정지된 사진이라면 후자인 그의 회화는 잔상의 원리를 적용한 영화처럼 여러 겹이 겹쳐 살아 움직이는 화면이 된다. 화면은 그 자체로 유동하는 오브제가 되어 두껍게 쌓인 물감층, 촘촘한 선들의 집적과 그 결을 보여주며 리듬과 파장을 내뿜는다. 회화는 시간에 대한 은유이며, 그 자체로 시간은 쌓여 어떤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나는 다소 지루해 보이는 작업 방식에 작가가 어떻게 반복적인 행위를 계속하는지 그 원동력이 궁금해졌다. 그와의 대화 끝에 작품의 형식과 작가의 태도가 동시대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몇 가지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과 감각에 관한 작가 특유의 사유와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은 그의 작업이 단순히 주관성이 극대화된 내면적인 회화가 아님을 확인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한병철은 저서 시간의 향기에서 오늘의 사회는 시간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진단한다. 스마트폰, 컴퓨터, SNS 등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시간도 조작 가능한 대상이 되었고, 전통적인 시간의 리듬, 그리고 그 리듬 위에 형성된 삶에 대한 감각도 잃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백요섭의 작업은 동시대 삶에서 유효한 방법론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작업 방식을 기억의 시차 적응법이라 명명하며 중첩된 시간 속에서 뒤섞여 있는 기억을 감각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한다. 이것은 무게를 상실하고 빠르게 휘발되는 시간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머무르는 기술에 관한 실험으로 읽힌다

   

최근 개인 간의 소통은 소셜 미디어에 의존하면서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을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때 사람들은 가상공간에 보이고 싶은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한다. 상품처럼 전시되지 않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기도 하는데, 한병철은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문제는 이미지의 증가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가 되라는 강압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다양한 색상과 수많은 질감과 켜켜이 쌓인 감정들로 이루어진다. 현실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나고 희한한 맛이 난다. 매끈한 디지털 화면은 그것을 구현할 수 없다. 백요섭의 작업은 실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이고, 예술가의 역할이라 웅변한다. 회화의 기록은 노력과 시간의 구체적인 결과물이다. 무엇보다 그의 회화는 즉각적인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흥분을 누그러뜨리고 시간을 음미하며 여운을 남긴다. 불명확한 층위는 더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 사이의 긴장은 삶의 풍부한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백요섭의 작업은 단순히 기억의 저장소는 아니다. 기억의 자취는 그 역사성 때문에 늘 새로운 관계에 따라 재정리되고 다시 쓰기의 과정을 거친다. 역사가 역사가에 의해 해석될 때 그 의미를 확보하듯, 회화 역시 감상자와 마주한 순간 그곳에서 아우라를 내뿜는다. 그의 회화를 실견하지 않고서는 이미지와 물질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위해 캔버스를 직접 제작했고, 몇 달에 걸쳐 작품을 완성했다. 4점의 회화는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연결된 구조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어두운 그린 톤을 띄고 있다. 아마도 숲, 나무, 잡초 등 자연의 이미지가 먼저 연상될 것이다.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던 그것은 감상자의 감각에 달려 있다. 내가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완성된 작품 앞에는 작가가 작업할 때 입었던 것으로 보이는 군복이 의자에 걸려있었다. 군복의 얼룩무늬가 위장을 위한 하나의 보호 장치임을 상기해볼 때, 최근 군복은 심지어 첨단장비로 관측할 때도 식별하기 어렵게 픽셀화된 디지털 무늬로 대체됐다. 군복이라는 우연적 요소 덕분에 흥미롭게도 이 작업은 나에게 아날로그와 디지털, 자연과 인간의 유비 관계로도 보인다.

 

이번 작업은 물감을 긁어낸 흔적이 면을 분할하며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무수한 선들은 서로의 진폭을 인정하며 끊임없이 에너지를 내뿜는 진자운동처럼 느껴진다. 또한 화면 가득 균질하게 담긴 작가의 손과 재료의 흔적을 통해 모든 위계적 구분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 앞에서 구상/추상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은 유효하지 않다. 추상의 외형은 형식실험 끝에 우연히 도달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 기다림의 감각을 복원하고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회화는 언제나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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