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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전시

현재 관람할 수 있는 전시내용을 소개합니다.
2022 아트랩대전 : 김진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2022 아트랩 ≪이경희전≫에 부쳐

민희정(미술이론)

1.

예술가라는 존재는 불가피하게 시대상이 제시하는 진리와 질서를 거스르는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라는 것이 다수의 논리라면 더욱 더 열정적으로 그 원칙을 해체하려 든다. 이경희는 분명 그러한 역할자다. 그는 동시대의 모순들을 파헤쳐 왔다. 세계화를 통해 상호 연결된 집단의 이데올로기와 이해관계, 양극단에 놓인 경제적 불평등의 가속화, 거대한 권력 구조의 횡포, 더욱 치밀해진 미디어의 프로파간다로부터 개인이 겪게 되는 일련의 상황들을 사유하고 공유했다.

2014년 전시 ≪종암동 프로젝트 - 종암동 머물기≫ 는 가족이라는 자아와 가장 가까운 존재를 통해 타자와 장소를 연결해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 작업으로, 그는 이상주의적인 대안이나 길고 복잡한 상황에 대한 부연설명을 피하면서도 타자성을 해체하고 우리가 겪고 있는 지역과 사회, 문화적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했다.

작가는 어린 시절 잠시 함께 살았던 할머니를 추억한다. 조모의 초상부터 그가 쓰던 낡은 전화기와 의자, 액자와 같은 오브제, 그가 필사한 성경 구절을 옮긴 텍스트까지, 전시장은 마치 제의적 공간처럼 그 시절의 사물들을 재현했다. 그리고 퍼포먼스 비디오를 통해 그를 불러들였다. 고인이 된 조모와 접신한 것처럼, 그는 할머니의 한복을 입고 기억이 가물가물한 옛 시간을 더듬어 할머니의 장소를 찾는다. 영상의 올드시티 풍경과 할머니가 즐겨들었을 법한 경음악은 관객의 취향과는 상관없이 향수를 부른다. 이 그리움은 무엇인가? 작가는 음악을 통해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시대성과 혈육이라는 존재성을 엮어 쉽게 타자성을 허물어 버린다. 고운 옥색 한복과 회색 장소 사이의 부조화 속에서 작가의 젊음은 더욱 무심하게 빛난다. 그것은 그와 과거 할머니의 삶의 괴리만큼이나 이질적인 대비다. 그러나 그가 입은 할머니의 한복은 실제 조모의 것은 아니다. 과거의 여성들이 입었을 법한 고운 한복, 작가의 기억 속 할머니의 옥빛을 가져왔다. 작가는 대상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내면적 의미에 이르기 위해 작은 표상을 동원하고 트릭을 장치한다. 바람에 살랑대는 치맛자락, 다소곳한 고무신으로 언뜻 할머니의 젊은 시절을 재현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겨운 듯, 지친 듯, 멍하니, 무심히, 어색한 현재를 무표정하게 담아낸다. 그것은 과거의 재현도 현대적 재해석도 아닌 정체성을 교차시키면서 사회로부터 제어된 상징성을 해체하려 한 것으로 해석된다. 작가는 두 정체성을 교묘히 하나로 겹쳐 놓음으로써 사회적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고자 했다. 젊은 작가와는 다른 시대의 삶을 살았던 타자로서 조모의 공간에 들어선 관객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숙명을 상기하게 된다. 동시에 옥빛 한복은 페미니즘까지는 들먹이지 않더라도 과거 여성상을 강요당하는 것에 대한 불편한 심경이나 은유적인 기호들의 작용으로 인해 복합적인 감정에 도달하게 된다.

한편으로 영상 속 인물이 머무는 종암동에는 공공미술도 장소 특정적 미술도 없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을 암시하는 오래된 건물과 간판들이 가득하지만 그곳의 삶은 담담히 펼쳐진다. 오히려 눈에 띄는 그의 존재는 어색한 시선과 주체들 간의 차이를 부각시킬 뿐이다. 이러한 연출은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미의식을 강요해 온 폭력에 대한 고발이자 진지한 미의식이 발현될 수 있도록 치열한 논의를 이끌어 내기 위한 전략처럼 보인다. 작가는 잠시 종암동에 머물며 그곳의 어느 무엇도 훼손하지 않고 주변에 대한 저항이나 유희만으로 본질에 접근하는 좀 더 유연하고 입체적인 방법론을 보여주었다.

2.

작가는 대형사건, 사고 같은 사회적 재난이 가져온 개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2015년에 발표한 작품 <이곳에 살기 위하여 (Pour vivre ici)> 는 이러한 문제를 고민해 온 흔적이다. 비디오에서 작가는 불과 물을 교차하다 결국 물에 젖음과 동시에 불에 그슬린 인물을 등장시켜 폴 엘뤼아르(Paul Eluard)의 동명의 시를 읽어 내려간다. 흥미로운 것은 영상에 등장해 글을 읽는 인물은 여성이지만 그 소리는 남성의 목소리를 통해 출력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중성화된 대상의 양태를 통해 그 절대적이며 본질적인 속성을 해체하는 방식을 견지한다. 여기서 낯선 감각들이 충돌한다. 남성 목소리의 출현은 인물이 가지는 여성성에 대한 심리적 변양을 가져오고, 결국 육체가 부재하는 남성성의 위장된 죽음은 또 다른 의미를 생성시킨다. 이 중첩은 사건의 진실에 관한 공방을 추적하는 다큐도, 작가의 예리한 분석에 의한 변증법적 논증도 아니지만, 작가는 진실한 위로 뒤로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교차시키며 신뢰할 수 없는 기호에 대한 각성을 유도한다.

작가는 개인의 소외가 온전한 개인의 것이 아닌 권력과 집단이 정해놓은 질서에 의해 운명 지워진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그 거대한 힘과 개인 사이의 괴리에 대해 탐색했다. <Army there> 시리즈는 전쟁에 대해 무감각해진 동시대 현대인들의 주한 미군에 관한 인식과 그간의 다양한 문제를 다룬 프로젝트 작업으로, 작가는 이 주제에 대하여 다년간 애정을 보였다. 2016-17년, 동두천 주한미군기지 주변 지역을 리서치한 ≪No U.S Army there≫ 을 시작으로, 2018년 연천 신망리의 미군 구호주택, 군부대와 관련한 ≪No army there-신망리≫(2018), 그리고 미군과의 인터뷰를 작품화한 2019년 ≪U.S army there≫ 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복잡하고 어려운 관계와 구조들, 그리고 그 사이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규칙들을 다루었다.

이 프로젝트는 주한미군에 대한 무거운 내용보다 이를 둘러싼 주변의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예를 들어 “A man who has shouldered this sad world”라는 문구를 인쇄한 명함을 미국부대 담장주변에 뿌리는 퍼포먼스 비디오나 청룡(靑龍)을 수놓은 인상적인 붉은 실크 가운에 “No U.S Army there”라고 텍스트를 새긴 와펜을 다수 장식한 의류작업은 철저히 놀이정신에 입각해 있다. 무심하고, 엉뚱하게 주제의 주변을 맴돌 뿐 그 중심을 저격하거나 문제의 핵심을 저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서로 다른 시선을 교차시켜 하나의 본질을 탐색하는 특유의 유희적 방식으로 관객의 비판적 생각을 끌어내는 것을 목적한다. 그러나 그의 문제제기는 철저히 약자인 개인의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에 연약한 저항, 그대로를 보여주며 대안이나 거창한 논의를 제안하지 않는다. 작가는 단지 ‘충’과 ‘효’라는 지배 이데올로기 안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진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공고한 관념을 미묘하게 흔들어 놓는 것에 집중한다. 그것이야말로 사소한 듯하지만, 결코 개인의 입장에서 불편하고 불쾌한 일들이 태연히 벌어져 결국 고통으로 이어지는 문제들을 막는 최소한의 실천이라 믿기 때문이다.

3.

이경희는 하나의 매체에 정주하지 않았다. 지금껏 회화와 조각과 같은 형식에서 부터 설치, 사진과 텍스트, 비디오, 퍼포먼스와 같은 다양한 매체, 그리고 자수, 인쇄, 디지털에 이르는 비형식적인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성에 도전해 왔다. 그가 매체를 유랑하는 것은 다원화된 동시대의 정신성을 공유할 뿐 아니라 작가로서 역량과 자신의 세계관을 확장하기 위함이었다. 익숙한 미술의 맥락을 넘어선 그의 방식은 공동체와 개인 간의 긴박한 이슈들을 스펙트럼화된 분석과 다양한 매체를 활용함으로써 설득력이 있는 메시지로 변환되었다. 여기에 더해진 장르의 혼합적 변용은 작가 특유의 유희적 감각에 꽤나 유효한 것들이었다. 특히 그는 영상의 이미지들로 조작하거나 왜곡하지 않은 순수성을 고집했다. 이러한 신념은 감출 수 없는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며 관객들이 상황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는 지점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경희는 이번 전시에서 그동안 쌓아 온 매체들에 대한 이해를 뽐내기보다 온전히 회화만을 탐색해 온 시간들을 공개한다. 그 이유는 회화가 매우 개인적인 매체라는데 있다. 회화는 너무 느리고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여지없이 사회와 격리된 채 답답함과 외로움에 지친 긴 시간을 보내는 예술가에게 이 고전적 매체보다 더 위로가 되는 것을 찾기란 쉽지 않다. 작가는 그린다는 행위에 안도하면서 다시금 관객에게 위로를 건넨다.

“Lasciate ogni speranza, voi ch'entrate”
모든 희망을 버려라, (이곳에) 들어오는 그대들이여

작가는 ‘단테의 지옥’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단테가 만든 디스토피아를 보면서 불현듯 우리가 마주한 불행과 일련의 고통스러운 상황들로 부터 아직 지옥으로 떨어지지도 않은 인간이 경험하는 또 다른 지옥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스스로의 나태한 인생에 비해 탐욕과 폭식, 애욕과 같은 욕망은 넘치며 사기, 위조, 배신이라는 가짜들과 쉽게 어울리고 만다. 틈새를 발견하면 어느새 타협하고 마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결국 지옥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며 불안과 공포를 껴안은 삶을 선택해 왔다. 그러나 지구는 불타오르고 전쟁의 참혹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오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의 골짜기에 홀로 남겨져 지옥을 맛본다. 아니 더욱 많은 사람들이 나락으로 떨어져 이 참혹한 맛을 보게 될지 모른다. 이 공포스러운 지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작가는 질병, 기후, 전쟁, 이데올로기, 자본, 이 모든 것과 맞서는 개인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것은 신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다. 불행과 맞서는 역할은 처음이지만 그는 과감하게 여신이 되어 심판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말이다. 신이 죽어버린 세상에서 지옥이라는 공포로 통제하려는 것이 유효하지 않듯, 작가는 오늘의 문화가 공허한 구호를 반복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여긴다. 이제 돌아갈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보다 항구적인 가치를 찾는 시간동안, 그는 개인과 지역문화, 그리고 보편적 가치 사이의 균열과 갈등을 재현이나 기술로 채우는 것이 아닌 긍정과 상상력이라는 근원적 에너지로 막는 편에 섰다. 또한 평면에서도 위트를 버리지 않으며 환유와 은유의 수사법으로 순환과 재생을 통해 정화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전한다. <단테를 위한 연작> 은 이러한 작가의 심상을 캔버스에 옮긴 인간이 인간에게 드리는 기도 같은 작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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