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전시
1964년 파리에서 활동하던 이응노는 세르누시 미술관의 바딤 엘리세프 관장의 지원 아래 동양미술 강좌를 공식적으로 개설해 프랑스인들에게 서예와 수묵화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2015년 이응노미술관은 <에꼴 드 이응노>전을 개최해 프랑스인들에게 동양화를 가르친 교육자로서의 이응노 활동을 조명한 바 있다. 파리에서 교육자 이응노가 이룬 업적은 중요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기에 전시는 이응노 강좌에 대한 당시의 신문, 사진 등을 이용해 1960~70년대 상황의 역사적 재현에 중점을 두었다.
이응노의 파리동양미술학교 활동은 프랑스 예술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질문에서 시작된 <푸른 눈의 수묵>전은 기록상으로 존재하는 파리동양미술학교의 실체를 이응노와 박인경에게 배운 11명의 프랑스 제자들의 작품을 통해 살펴보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응노 사후에도 동양화 수업은 제자들을 통해, 그리고 유족인 박인경 화백과 이융세 화백의 강좌를 통해 면면히 지속되어 왔다. 전시에 참가한 재키 & 마르탱 페렝, 크리스틴 다바디-파브르게트, 클레흐 키토, 엘리자베스 뷔르겅, 플로랑스 슈로빌트겐, 프랑수아즈 플로토, 이네스 이겔닉, 장 비유후, 노엘 사메, 시빌 프리델, 비르지니 카다르 트라바델은 모두 파리동양미술학교에서 서예와 수묵화를 배웠으며 현재 예술가, 교육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응노는 동‧서양 미술이 교차하는 1960년대 파리에서 프랑스 일반인들에게 먹과 붓의 사용법을 직접 가르쳤다. 동양미술을 가르치는 기관이 없었던 당시 파리에서 이를 배울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은 큰 화제가 되었다. 프랑스의 저명한 미술사학자인 다니엘 엘리세프교수는 이를 두고 “혁명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1964년 1월 31일자 신문 <트리뷴 드 로잔 >의 기사를 보면 이응노의 강좌에 대해 ‘학생들이 등록을 마쳤고 첫 수업은 2월에 열릴 예정이며 후지타 쓰구하루, 자오우키와 같은 재불 아시아 화가뿐만 아니라 피에르 술라주, 한스 아르퉁과 같은 유럽 화가들에게도 큰 지지를 받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프랑스, 중국, 일본 등 파리동양미술학교 후원자의 다양한 국적은 그 당시 파리에서 벌어지고 있던 추상미술 실험과 동양미술학교 설립 사이의 연관성에 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당시 서구 작가들은 동양미술에서 영감을 얻어 추상미술의 영역을 넓혔고, 유럽에서 활동하는 아시아 작가들은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모더니즘 회화의 창작을 꾀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응노의 미술강좌는 동서양 예술의 교차로 역할을 했다. 그의 수업은 붓 쥐는 법부터 시작해 기초에서부터 심화까지 학생들의 수준에 맞게 세분해 진행되었고 작품 발표를 위한 전시회도 개최했다. 매년 여름에는 프랑스의 산과 바다로 연수를 떠나 자연물을 관찰‧묘사하는 사생의 시간을 통해 붓과 먹을 쓰는 기법을 익혔다. 2009년에는 이응노 서거 20주년을 기해 대전에서 하계연수회가 열리기도 했다. 2013년에는 이들 중 크리스틴 다바디-파브르게트와 클레흐 키토가 <먹과 붓의 대화>라는 동양화 개론서를 프랑스에서 출판해 스승 이응노를 기렸다. 파리동양미술학교를 거쳐간 학생은 3천여명이 넘는다.
근대화 이후 우리는 일반적으로 서구 모더니즘의 규범에 맞춰 스스로를 평가하고 재단하곤 했는데, 이응노의 경우엔 프랑스 사회의 타자가 서구 중심 문화에 영향을 끼친 독특한 경우라 볼 수 있다. 그는 프랑스에서 현대미술을 습득했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동양의 전통을 가르쳤고 전통의 바탕에서 추상의 새로운 표현을 개척했으며 그의 예술을 계승한 제자들을 육성했다. 프랑스 제자 11명의 작품은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지만 소재와 구성, 먹과 붓을 쓰는 방식에서 스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서예, 한자 모티브를 창의적으로 변용하기도 하고, 서필의 운동감을 회화적 표현으로 바꾸어 내기도 하며, 한국의 시를 회화적으로 표현한다. 동서양 예술의 상호 영향적 관계를 떠올려 본다면 제자들의 작품은 탈-서구중심주의 사례이자 서구 미술과 대등한 위치에서 동양적 현대미술을 개척한 이응노의 유산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가 11명의 프랑스 예술가들을 통해 동서양 예술의 융합과 평화를 지향한 이응노의 예술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