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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예정

이응노미술관 예정전시 내용을 소개합니다.
2021 아트랩대전 : 8월의 작가 천찬미

이 모든 것을 창조한 존재

 

이선영(미술평론가)

 

찬미라는 독특한 이름 때문일까. 작가의 세계에 대한 예찬은 거의 운명적으로 다가온다. 동음이의어지만, ()또한 보이지 않고 가까이하기 힘든 영역까지 찬미의 대상일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찬미에 바탕 한 작품에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가득하다. 시대가 강요한 억압적 질서가 더욱 묵직해진 요즘 젊은 세대의 우울과 어두움은 찾아볼 수 없다. 처음부터 없었다기보다는 지양되었다. 극복된 어둠은 작가에게나 관객에게 쾌감을 준다. 쾌는 주관의 생기 넘치는 힘에 대한 은유가 되며, 불쾌는 이러한 힘의 감소에 대한 은유’(리오타르)가 된다면, 힘찬 필치로 가득한 천찬미의 작품의 지향성을 가늠할 수 있다. 특히 어떻게 그렇게 생겨났는지 오묘한 자연에 대한 찬미는 작업의 기조를 이루는 회화뿐 아니라 사진, 영상, 설치 등이 골고루 안배된 전시 작품 하나하나에 스며있다. 천찬미의 작품 속 긍정적 에너지는 작고 하찮은 것을 크고 중요하게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에서 생겨난다.

 

작품 [Green day]에 나타나듯, 작가는 작은 새싹 하나를 화면의 주인공으로 삼기도 한다. 사진 작품 [Community]는 크고 작은, 여러 형태와 색감의 돌멩이들을 화면 가득히 담아놨다. 통상적으로 풀이나 돌은 주목되기보다는 발에 채이는 미미한 존재일 따름이다. 단으로까지 치달은 인간 문명이 변질시킨 자연의 역습으로 전 세계가 고통을 받고 있는 가운데, 작가는 자연적작품에 내재한 치유력을 기대한다. 예술작품을 비롯한 인공물은 자연이라는 찬란한 존재의 미흡한 유사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러한 현격한 차이가 이데아와도 같은 이상적 원형에 좀 더 다가서려는 노력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작품마다 다르게 설정된 상황에 힘차게 다가가는 또는 뛰어드는 듯한 이미지가 곳곳에 자리한다. 이 기호적 형상은 정확한 재현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즉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다. 상형문자처럼 인간이 기호화된 모습이지만 인간 형상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자연에 대한 공감 능력은 자연에 투사된 주체의 모습을 다변화한다. 전시가 열리는 미술관의 이응노 화백의 활기차게 움직이는 군상 이미지도 떠오른다. 천찬미의 경우에는 허공 또는 여백이 아니라, 주체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진 크고 작은 존재들과의 교감이 두드러진다. 바다부터 하늘까지, 숲부터 정원까지, 그 안에서 생로병사를 거치는 크고 작은 생명들이 모두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다. 그것은 평생 그림을 업으로 삼을 작가로서는 좋은 조건이다. 소재뿐 아니라 작은것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자연은 기꺼이 대답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 또한 쉽게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다. 자연은 거듭되는 해석의 대상이다. 인간이 자연을 많이 정복해 왔지만, 자연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미지의 자연은 신비와 불안의 원천이다. 문명 생태계의 비중이 커졌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천찬미의 작품 속 자연에는 기술과학이 자연을 잘게 나누어 자기들의 전문용어로 전유하기 이전의 시점이 살아있다.

 

계통발생적으로 그리고 개체발생적으로 동일한 원시인-아이의 시점이다. 그림 그리기 기술을 배우기 이전의 천진한 화법은 그러한 관점 및 자세, 감수성과 연관된다. 한국미의 원류로 흔히 말해지는 무기교의 기교처럼, 천찬미가 구사하는 기법 아닌 기법은 자신 안에 잠재된 자연력을 일깨운다. 작가는 손이 풀리기 이전에 더 잘 그려진다는 역설을 말한다. 자유로운 필치와 풍부한 색감이 결합 된 드로잉 기반의 작품에 아크릴과 유화 외에 많이 사용하는 매체는 오일 파스텔, 목탄, 크레파스 등이다. 그러한 매체들은 감성과 의도를 가감 없이 드러내게 한다. 예술의 자율성이 확립된 근대에 종교 또한 배제되었지만, 천찬미는 그 또한 있는 그대로 안고 간다. ‘진리자유같은 종교적 뉘앙스가 강한 개념은 세계에 대한 찬미와 함께 가는 것이다. 감성이든 생각이든 그럴듯하게 꾸며내려 할수록 꼬이는 것이 작업이라면 솔직함은 작품의 본질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 일 터이다.

 

혼합재료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형식적 발상이기보다는 자연 자체의 복합성이 반영된 것이다. 화면 가장자리도 들쭉날쭉 정리되지 않은 작품들이 많은 것을 보면, 정식으로 힘줘서 그리는 방식보다는 작품에 진입하는 장벽을 낮추려는 선택이 보인다. 이러한 선택은 힘 빼고 그린 그림이 더 힘이 있을 수 있다는 역설을 낳는다. 심지어는 달력 뒤에 그린 작품도 있는데, 그것을 초벌 그림으로 삼아 정식으로캔버스에 옮기기보다는 그대로 제시함으로써 최초의 신선함을 전달하려 한다. [찬미의 정원]이라는 전시 부제처럼, 자연은 정원으로 상징되면서 식물이 많이 등장한다. 작가는 수많은 생명이 한데 어우러진 풀숲을 담은 사진 작품에 [깊고 찬란한]이라는 제목을, 푸르름이 가득한 풀숲을 담은 사진 작품에 [꿈결]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사유를 드러낸다. 작가에게 환상적 아름다움의 원천은 진리와 자유의 원천이기도 하다.

 

작품 [Green day]마치 녹즙으로 찍어 그린 듯한 푸릇한 신선함이 느껴지며, 채우지 않고 비워둔 빈 공간은 화면 아래의 새싹처럼 미지의 가능성으로 충전되어 있다. 생각도 너무 많이 하지 않는다. 생각을 안 한다기 보다는 작업 중에는 했던 생각도 잊어버린다. 대략의 얼개만을 가지고 떠나는 정처 없는 여행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러한 여행 중의 선택을 좋아한다. 작품에는 작가만이 알아볼 수 있는 지도가 깔려있다. 정원처럼 자기 손바닥 안에 있는 듯한 친숙한 공간에도 예외는 없다. 예술에 필요한 승화란 관념화가 아니라 일시적으로나마 다른 것으로 되기에 가깝다. 니체가 강조한 바 있는 창조적 망각이 필요한 이유는 제도 교육을 비롯한 여러 가지 권력적 장치에 의해 현대인의 뇌리와 육체에 스며있는 자기 검열을 탈피하기 위함이다. 스케치북이나 캔버스가 아니어도 손에 닿는 거칠게 또는 신나게 그어댄 작품에는 코드화된 방식을 거부하려는 ()의식적 몸짓이 있다.

 

이 전시에서 정원은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자연에 상응하는 축소 모델이다. 야생의 자연, 또는 생산력의 수탈에 맡겨진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협력적인 관계의 산물이다. 여기에서는 자연만으로도 인간만으로 불가능한 상호적 관계성이 중요하다. 철학자 롬바흐는 [정원의 철학]에서 풍부하고 다양한 삶의 나누어지지 않은 통일성을 상징하고 포함하는 근본 현상으로는 정원 외에 예술작품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예술작품에서 발견되는 형상은 무의도적으로 완전히 자신과 자신의 고유한 전개 경향성으로부터 생겨났어야 하고 동시에 의지에 의해 규정되는 인간의 형성 능력에 의해 생겨났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크 브로스도 [식물의 역사와 신화]에서 인류학적 상상계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적절한 무질서 속에서 자라나는 정원, 먹을 것 뿐 만 아니라 몸을 치료하고, 또 몸을 곱게 단장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자라는 정원을 찾아낸다.

 

자크 브로스는 정원을 둘러싸인 것, 고립된 것을 의미함을 강조하며, 가장 오래된 정원은 다듬어지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식물이 자라며, 그렇기 때문에 제한되어 있고 폐쇄되어 있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화면의 외곽선이 분명하지 않은 작품들이 많은 [찬미의 정원]은 자족적이기보다는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한다. 이 정원에서의 축제는 재배든 요리든 땀 흘리는 노동을 부정하지 않는다. 천찬미에게 타자는 신과 같은 절대적 타자 뿐 아니라, 작품으로 일궈놓은 정원에 초대하고 싶은 타자들이다. 전시 부제와 같은 제목의 작품 [찬미의 정원]바다와 나무, 해와 달과 별, , 꽃들이 있는 소우주로, ‘정원의 모든 풍경에 깃들어있는 순수와 자유, 진리와 사랑’(작가노트)을 표현하고자 했다. 작품 [찬미의 정원](2021)은 여러 화면으로 나뉘어 있으면서도 그 위에 그어진 색 선들에 의한 연결이 특징적이다. 음식을 나눌 식탁의 설계도와 대지와 바다에서 나오는 것들이 4개의 천 조각에 각각 담겨 연결되어 있다.

 

거기에는 십여 명 안팎으로 설정된 손님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무엇인가 열심히 준비하는 존재가 암시된다. 처음 제목이 [초대]였던 이 작품은 천찬미의 정원이 폐쇄된 사적 영역이 아니라, 타자들과 함께 하는 열린 공간임을 알려준다. 작품 [Green day]에 나타나 있듯이, 동식물과 아이가 함께 있는 공간은 위험하지 않는 성경의 이상향이다. 그것은 여러 차원의 세계를 한데 묶는 정원술과 예술의 공통점이다. 파리에서 본 어느 집에서 영감을 얻은 정원 관련 작품은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머릿속으로 정원의 지도를 그리며 걷는 상상을 한다. 자연은 시간차를 두고 서서히 펼쳐진다.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화면은 그 내부를 탐사하도록 한다. 정원 안에는 작은 집이 있다. 작품 [A House]는 삼각형 지붕과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단촐한 집이 자리하고 있으며, 존재의 상징인 집을 에워싼 것은 호의적인 우주이다. 석양을 담은 큰 창문 세계와 어디선가 들려온 노래 가사와 상대의 안부를 묻는 문장이 적힌 화면은 꽃과 나무가 있는 집의 한가로운 오후를 나타낸다.

 

작가는 스카프 펼쳐 놓은 크기의 자그마한 작품에 인류 보편의 염원을 농밀하게 담는다. 작품 속 정원이 풍요와 평화를 담으려는 지상적 소망의 상징이라면, 바다는 땅과도 다른 실재계이다. 바다가 나오는 사진 작품 [블루]는 수평선 부근에 작은 배가 떠 있는 푸른 물결 출렁이는 바다를 통해 인간과 자연을 극적으로 대조한다. 대지와 바다는 묵직한 존재감을 가지는 실재에 대한 대표적 은유지만, 천찬미의 작품 속 실재계는 고정된 본질보다는 변화무쌍한 잠재태에 가깝다. 펜과 아크릴로 그린 작품 [바다]는 화면 한가운데 푸른색의 굵은 가닥이 바다의 파도를 암시한다. 노트 정도 크기의 작품에 담긴 바다는 파도와 함께 춤을 추는 듯한 존재들 또한 표현한다. 작품 [바다]는 필기구를 처음 손에 쥔 아이처럼 즉발적인 표현으로 채워진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바다의 하루는 어떤 이야기를하고 있는지 묻는다. 작품 [The truth will make you free 1]은 묵직한 제목과 달리 매우 발랄한 색감과 액션이 두드러진다.

 

화면 가운데 십자가 형태에 힘차게 다가가는 듯한 사람의 실루엣이 보인다. 빠르고 확신에 찬 손놀림은 진리 안에서 자유를누리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작가는 이 자유 안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삶은 물론이고 자유로운 예술에서조차 그 자유라는 것이 실현되기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인식한다. 근대 계몽주의의 역사가 알려주듯, 진리는 온통 권력에의 의지로 점철되어 있다. 자유는 권력자의 자의로 퇴행하기 일쑤다. 현상, 특히 인간적 현상은 이상주의자의 입장에서 인정하기 힘든 점이 많다. 천찬미의 작품 속 긍정은 단순한 긍정이기보다는 부정의 부정이다. 설치작품 [만든 이가 있다]는 창조에 대한 상상을 조형적으로 풀었다. 살아있는 식물과 그것과 흡사한 구조를 한 인공물을 병치시킨 것으로, 동형적 구조를 이루는 자연과 인공물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창조한 존재를 추리한다. 만들어진 것은 변화시킬 수 있다. 본래의 순수함으로의 복귀이든 미지로의 변신이든 말이다. 이 대목에서 종교와 예술의 지향점은 겹쳐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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