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전시
2024년은 이응노(1904~1989) 탄생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이응노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은 공동으로 《이응노, 동쪽에서 부는 바람, 서쪽에서 부는 바람》을 개최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공립미술관 전시협력사업의 일환이기도 한 이 전시는 국외 소장품들이 대거 출품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의 새로운 작품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이 국제전의 중심에 놓인 키워드는 ‘융합’이다. ‘융합’은 70여 년에 걸친 이응노의 창작활동을 관통하는 단어이다. 이응노 자신은 이를 ‘충돌’(interférence)이라고 했다. 이응노가 설립한 파리동양미술학교 학생들의 전시회 타이틀이기도 했던 이 용어는 예술 활동 참여자가 “자신만의 창의적 언어를 발견”하며 “궁극적으로 동양과 서양 예술이 함께 질적으로 풍성해지는 것”이었다. 곧 모든 창의적 언어들이 대등한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비약시킨다는 의미로 정리될 수 있다. 이 용어가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이응노의 작품세계는 동양과 서양, 식민지와 제국주의 등 사회·문화적으로 서로 길항하는 요소들의 충돌과 이에 따른 끊임없는 재해석에 의해 구축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미술 내적으로도 문인화와 민화, 감상화와 장식화 등 한국미술사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상호교차했다. 이번 국제전은 이렇듯 이응노가 여러 경계들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창조한 융합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응노미술관에서는 2014년 이응노의 독일에서의 활동을 살펴보는 전시 《서독으로 간 에트랑제, 이응노》를 개최했다. 독일은 이응노의 유럽활동이 시작된 곳이었다. 유럽에서의 이응노 궤적을 따라가는 이응노미술관의 프로젝트는 이 전시를 시작으로 프랑스, 스위스 등으로 범위를 넓혀 갔다. 주로 이응노가 유럽으로 이주한 1960년대 이후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서양미술계의 중심으로 진입한 후에 보여준 성과에 집중한 전시들이었다. 이 전시들을 통해 지필묵이라는 동양 재료를 이용한 그의 작품들이 유럽 미술계에서 불러온 열광이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또 한글과 한자를 이용한 문자추상과 조각과 도자기, 태피스트리 등 이응노의 끝없는 탐구열이 전달되는 기회가 되었다.
이응노미술관의 최근 전시는 공간적으로는 유럽에서 한국으로, 시간적으로는 유럽으로 이주하기 이전인 1958년부터 작가로서의 초반 모색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응노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안목 청관재 이응노 컬렉션 전》(2022), 《70년 만의 해후 전》(2023) 등이 그것이다. 이응노는 전통 동양화의 형식과 재료에 구애받지 않으며 누구보다도 창조적인 작가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에는 자신이 몸담았던 동아시아와 한국의 유구한 전통이 쉼 없이 얼굴을 드러낸다. 동아시아 서예의 역사가 이응노 작품의 토대를 이루었는가 하면, 1920년대 후반부터 운영했던 간판업과 실내 장식업은 동시대 한국 작가들에게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디자인적인 분위기를 작품에 불어넣기도 했다. 중국 갑골문부터 아랍문자까지, 무대 위 군무(群舞) 장면을 그린 군상에서 전통적인 산수화까지, 사군자에서 벽지 디자인까지 천태만상인 작품에서 그가 참조한 전통의 뿌리를 찾아내 그 영향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이응노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번 국제전은 이응노가 유럽 이주 이전과 파리에서 그린 전통적인 작품들을, 서양 모더니즘 실험작품들과 나란히 전시하여 동아시아와 유럽, 전통과 현대의 다양한 요소들이 주고받은 관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이응노의 작품은 수많은 문화에서 영감을 얻은 조형 언어들과 모델들이 충돌하고 변형되며 새롭게 융합되어 만들어 낸 축제의 장이었음이 전달되기를 바란다.
이응노미술관은 미공개작이 대거 공개되는 이 전시가 이응노 연구의 새로운 전환이 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전시 외에 국제 학술심포지엄을 함께 개최한다. 전시 도록에 함께 수록되어 있는 연구논문들은 이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것들이다.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여 국내외 연구자들이 함께 모인 이 심포지엄을 통해 향후 이응노의 연구가 확산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이 국제전과 심포지엄이 제기하는 앞으로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