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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예정

이응노미술관 예정전시 내용을 소개합니다.
중견작가 전시 프로젝트

이응노미술관 지역작가 전시사업 _박은미

색을 통한 소통과 치유를 꿈꾸다.

 

허나영(이응노연구소 연구위원)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완전한 암흑을 경험하진 못한다. 강도만이 다를 뿐, 매 순간 빛에 노출되어 있다. 빛은 우리의 눈에 닿아 시각세포를 자극하고 뇌에서 처리되면서 ‘색’으로 인지된다. 높고 맑은 가을하늘에서는 파란색을, 초록빛의 여름 산에 찬 바람이 불면서 변한 나뭇잎들은 붉은색으로, 그리고 추운 겨울을 지나 봄을 알리는 개나리의 샛노란 색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눈은 카메라와 달라서, 보이는 빛을 그대로 수용하여 알 수는 없다. 게슈탈트 심리학이나 뇌과학의 최근 연구에서도 밝혀졌듯이,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만 볼 수 있다. 눈을 통해 받은 빛의 정보는 뇌에서 기존의 경험에 맞춰서 해석되면서 인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학적 원리를 차치하고서도 우리는 영화 <아바타>의 유명한 대사 “I See You”를 이해한 바 있다. 이 대사에서처럼, 본다는 것은 그 대상을 안다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여러 층의 색이 가득한 박은미의 화폭에는 그만큼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을 것이다.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리다. 

박은미는 독일 브라운슈바익에서 12년간 미술공부를 하고 독일 및 대전 등에서 수차례 개인전과 국내외에서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한 중견작가다. 그의 작업은 크게 변화를 했는데, 이전 작업에서는 최근작과 다르게 사실적인 형상을 기반으로 하였다. 작가 자신이 총구를 정면에 겨누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미지를 그리거나 설치하여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박은미는 일반적으로 익숙한 생활용품이나 통속적인 문화의 이미지 등을 활용해서 현대 사회에 감춰진 메커니즘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중에서도 <다이하드(Die Hard)>와 같은 영화를 보는 동안 영화 속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죽는데, 그동안 자신은 그저 팝콘 한 봉지를 먹고 있다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모순에 대해 고민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총을 든 천사의 모습을 통해서도 선과 악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에 대해서 표현하였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현대사회의 모순은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쉽사리 말로 꺼내기는 힘든 것들이다. 막상 어떠한 행동을 하거나 주장을 하기에 너무나 무거운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세계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숱한 사회적인 부조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기도 하고,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이 다른 곳에서는 고통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을 박은미는 형상과 오브제로 제시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관람객이 보다 피부로 와닿을 수 있게끔 그리기도 하고 미디어나 사진, 설치 등 다양한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박은미는 돌연 색으로 가득한 화면을 제시하였다. 

 

색에 담은 이야기를 나누다. 

가로 혹은 세로의 색 줄로 가득한 화면에는 <무제>라 제목이 달려있다. 일견 미국의 추상화가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1936-)의 초기작품이 생각나기도 하고, 프랑스 작가 다니엘 뷔랑(Daniel Buren, 1938-)의 줄무늬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물감의 번짐을 보면 이우환(1936-)의 <선으로부터> 연작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스텔라가 말한 “당신이 본 것이, 당신이 본 것이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에 해당하는 모더니즘적 추상회화일까. 아니면 뷔랑이 줄무늬가 공간을 재단한 개념적인 작업일까. 혹은 이우환처럼 현상학적인 주체와 대상에 대한 이야기일까. 여러 추측이 가능할 것이고, 물론 감상하는 이의 생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박은미의 이전 작업을 본다면, 작가가 그린 줄무늬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녹아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주관적, 객관적 경험과 감정들이 ’색‘으로 뇌에 저장된 기억들을 꺼내 직선의 색면으로 표현한 추상회화이다. … 위아래를 잇는 수직의 반복적 행위들은 본인의 무의식 속에 하늘과 땅을, 그리고 수평은 세상과 나를 잇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렇게 인간과 신의 관계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반영된 것이다.”(작가노트 중)

 

박은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살아가면서 만나고 경험했던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은 어쩌면 하나하나 구체적인 형상으로 꺼내어 설명하기에 너무나 많을지 모른다. 어떨 때는 마음속에 떠오른 그 감정이 모호해서 묘사하기 힘들기도 하다. 그리고 같은 감정과 생각이라도 누구와의 추억인지 혹은 어떠한 상황이었는지에 따라서 그 깊이와 농도도 다르다. 이러한 미묘한 느낌을 작가는 색으로 나타낸 것이다.

색의 속성에는 초록이나 빨강과 같은 ‘색상’ 뿐 아니라, ‘명도’, ‘채도’도 있다. 그래서 박은미의 작품 중 초록계열의 화면이라 할지라도 각 선은 조금씩 다른 명도와 채도를 가지고 있고, 더불어 수용성인 아크릴과 잉크가 캔버스 천에 스며드는 정도에 따라 다른 색의 선이 나타난다. 더불어 작가는 천의 뒷면에 물감을 칠해서 스며 나오게 되는 색다른 색의 효과도 함께 나타내었다. 그래서 마치 감미로운 하프의 줄처럼, 혹은 강한 일렉트릭 기타의 줄처럼, 각각의 줄은 저마다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기에 현악기를 연주하듯 하나하나의 선을 음미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박은미는 수직선이나 수평선을 통해 하늘과 땅을 잇고 세상과 자신을 연결하고자 하는 소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반투명의 컬러 PVC를 활용한 원형이나 사각형을 모빌처럼 걸어서 전시장에 함께 설치하여 작품 간의 연결성을 주고자 한다. 색이 빛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듯, 모빌과 같이 움직이는 반투명의 도형을 통해 투과되거나 반사되는 빛은 또 다른 색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회화 속 색 선들은 또 다른 이야기로 변주되게 된다. 이러한 효과는 작품이 설치된 공간에 관람자가 들어서서 움직이면서 활성화된다. 어떠한 관람자가 들어오는 지, 그리고 그들이 작품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따라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소통을 통한 치유를 꿈꾸다. 

박은미는 구체적인 형상와 오브제를 표현하던 작업하던 어느 날, “색이 갖는 치유의 힘과 에너지”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시각예술작가이기에 색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을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우리는 따스한 아침 햇살에 행복해하고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회한에 잠기기도 한다. 그렇듯 자연 속 빛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색을 통해 인간이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매순간 느끼고 있다. 그러한 감정을 작가는 포착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시각예술가이기에 자신이 색에서 받았던 위로와 치유를 표현하여 더 많은 이들에게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의 초록선을 보고도 우리는 많은 감정과 기억 그리고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한 미묘함을 박은미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컬러테라피나 색채학 등 학문적인 분야도 있다. 그렇지만 추상화가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가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12)에서 말하는 색과는 다르며,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색의 의미와도 다를 것이다. 어떤 이에게 초록색은 평안함의 상징일 테지만, 어떤 아이에게는 무서운 초록 마녀를 떠올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박은미 역시 개인적으로 느낀 경험과 감정에 따라 다른 색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게 떠오른 색을 시각예술가로서 화폭에 세밀하게 옮기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표현했다. 또 한편으로 작가는 직선으로 하늘과 땅이 연결되고 수평으로 세상과 자신이 연결되듯이, 색으로서 그림을 보는 이들이 서로 소통하고 치유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몇 해 전 겪었던 팬데믹, 끝나지 않는 전쟁과 분쟁 그리고 기후위기까지 세상엔 불안하고 걱정거리투성이다. 그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위로하며 자연과 함께 세상을 치유해가길 소망한다.

 

 

 

 

이응노미술관 지역작가 전시사업 _이인희

삶의 모순을 담은 송가

 

허나영(이응노연구소 연구위원)

 

살아가면서 떠오르는 수많은 질문 중에는 답이 없는 것이 많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와 같은 큰 질문에서부터, 월요일마다 왜 이리 일어나기 힘든지, 사춘기 자녀의 투정에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부모님이 건강하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세상은 물음표 투성이다. 그중에서도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일지 모른다. 이루고 싶은 목표에 비해 자신은 한없이 모자라는 거 같고, 예상치 못한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기도 하다가 엉뚱한 곳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안정된 직장과 집을 갖고 싶다가도 갑자기 훌쩍 떠나고 싶기도 하고, 결혼 꿈꾸다가도 육아가 힘들다는 이야기에 비혼주의를 선언하고 싶기도 하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의 마음도 알기가 어렵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인간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시간을 의미하며 모든 인간의 현재가 바로 삶인 만큼, 인간의 역사만큼 수많은 학자와 문학가들이 삶에 대해 고민했으며 음악가가 노래했고 화가가 그림을 그렸다. 

 

삶에 대한 찬가

이인희는 풀잎과 크리스털, 집, 나무, 구름, 공, 꽃, 텐트, 가로등 등 다양한 사물을 통해, 삶에 대한 시각적 메타포를 담았다. 작가는 “화면 속 사물들은 도구로서 기능을 상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고 한다. 그림 속 형상들은 서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본래의 자리에 있지도 않다. 초현실적 화면 속에서 그저 이질적인 사물들끼리만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각 사물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기능과 역할은 최소한만 남는다.

나무는 뿌리를 내렸지만 풀잎 위에 위태로이 서 있고, 크리스털은 꽃무늬 잎사귀 끝에 물방울처럼 매달려있다. 꽃나무가 있는 집에는 누구도 살기 힘들 것 같고 유리병에 꽂힌 흰 꽃은 그 주인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작은 가로등 빛은 풀숲을 비추고, 구름에서 내린 금색 비는 잎사귀를 타고 흘러내린다. 마치 꿈에서 일어나는 듯한 이 장면들은 작가가 부여한 의미를 가진 알레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해 작가는 제목인 <디오니소스 송가(Dionysus Ode)>로 힌트를 준다. 

이인희의 <디오니소스 송가>연작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가 쓴 『디오니소스 송가(Dionysos-Dithyramben)』(1988)와 같이, 전형성을 탈피하면서 인간의 삶과 예술에 대해 그리고 있다. 작가는 자신만의 송가에서 인간의 본성이 양면적이고 모순적이라고 노래한다. 유목적 삶과 정착, 강인함과 연약함, 정신적이면서도 물질적인 가치에 대한 갈망, 고결함과 음탕함이 공존하기도 하고, 정의롭지만 한편 비열하며, 반대로 불량함 내부에서 선량함을 발견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점에서 인간이 이인희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한 소재인 풀잎 같다고 본다.

하늘을 향해 자라지만 풀잎은 가지에서 뻗어나와 길어지면서 결국 땅으로 향하게 된다. 이러한 지점이 마치 인간이 이상을 꿈꾸면서도 현실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이인희의 작품 속 풀잎은 한 명의 사람이다. 일정한 경계 안에서 풀숲과 같이 서로를 의지하거나 다투면서 무리를 이루기도 하고, 벽에 붙어있는 한 장의 풀잎처럼 주어진 상황에 맞춰서 살아가기도 한다. 

색색의 아름다운 꽃무늬가 입힌 풀잎에는 작은 집과 꽃나무, 공이 있기도 하고 금색 새싹이 자라기도 한다. 그 위에는 작은 구름이 떠있기도 하다. 화사한 색감과 사랑스러운 모양의 오브제들과 함께 예쁜 무늬과 색의 이파리 끝에는 빛나는 진주나 크리스털과 같은 보석이 달려있다. 마치 풀잎의 이슬이 보석으로 변한 듯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잘못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공존하지 못한다는 사실 뿐 아니라, 이 아름다운 모든 것들이 투명한 셀로판테이프 하나에 의지해 있고, 두께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얇은 이파리는 무거운 보석을 잎 끝에 매단 채 이 상황을 겨우 버티고 있다.

겉으로 보아서는 더 없이 아름답고 안정되어 보이지만, 실상은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렇기에 이 상황은 언제 끝이 날지 모른다. 마치 언젠가 죽음이 오는 우리의 삶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이인희는 와인, 축제, 광기로 대표되는 디오니소스의 송가로 이러한 삶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렇다. 어쩌면 이 위태로운 상황에서조차 한번 더 아름답게 살아간다면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인생은 어쩌면 이러한 모순 속에서 꽃 피는 것일지 모른다.

 

영원한 현재

인간은 자신만의 정체성을 가지면서도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고정된 특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자기’를 갖는다고 니체는 말했다. 그리고 니체는 모든 사건은 무한히 반복된다는 영원 회귀(Ewige Wiederkehr)를 말하면서,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긍정하고 의미있게 살아야한다고 말했다. 이인희가 말하는 ‘영원한 현재’ 역시 유사한 개념을 보여준다.

 

“끊임없이 다가올 새로운 현재는 기억을 생산해내는 모체이다. 그러하기에, 영원히 반

복해서 살아도 좋을 만큼으로 새로운 현재를 살아간다면 봉인된 채로 남겨진 비정함의 

기억도 변이되고 정화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에 따른 기억과 망각의 생성은 분해와 

중첩의 과정을 통해 대체 불가능한 인간의 삶을 구축한다.”(작가노트 중)

 

과거의 삶인 기억은 계속해서 현재로 틈입하며, 지금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러한 기억이 변화할 수 있다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이 가지는 필연적인 속성인 망각은 현재에서 또 다른 기억을 만들어내고 삶을 형성하고 있다고 이인희는 말하고 있다. 그렇게 기억이 틈입되고 새롭게 현재에서 변화하고 지워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이 되는 것이라고 통찰력있게 말한다. 이는 이름모를 풀들이 어느샌가 땅을 비집고 나와 자라고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다가 결국은 시들어 말라버리는 반복되는 생명의 과정과도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쩌면 멜랑콜리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대지의 노래를 듣고 이 순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작가의 생각이 풀잎으로 가득한 화폭에서 자라났다.

수많은 풀잎 가운데 작은 공간에 있는 텐트, 사이를 떠 다니는 구름, 풀숲에 빼꼼히 열린 커튼, 그리고 풀숲에서 나와 내리는 눈을 비추는 가로등, 이 모든 것들은 기억의 파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파편들은 변형되고 새로운 이야기를 갖게 되면서 현재를 만들어 간다. 그렇기에 이인희 속 그림은 매 순간의 현재인 것이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한 유명인의 노래로 유명해진 말 ‘아모르 파티’, 이는 니체의 유명한 경구이기도 하다.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어찌보면 당연하면서도 자신있게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하기 힘든 말이다. 니체가 말한 운명은 신의 영역이 아니다. 계속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자기로 살아가는 현재, 이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모르 파티를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니체는 인간의 삶을 세단계로 보았다. 첫 번째 단계는 ‘낙타’이다. 사막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하염없이 걸어야하는 낙타처럼, 인간의 삶은 그저 고된 고통의 연속이다. 그러다 다음 단계인 ‘사자’가 되면, 그 짐을 벗어던지고 용기있게 자기를 드러내고 포효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인 ‘초인(Übermensch)’의 단계가 되어야, 마치 ‘아이’와 같이 춤추고 노래하며 즐겁게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때 바로 ‘아모르 파티!’를 자신있게 노래할 수 있다. ‘디오니소스 송가’를 부르면서 말이다.

이인희가 보여주는 풀잎들은 예쁜 색과 정갈한 형태로 시선을 끈다. 그렇지만 그 속에는 비합리적인 기억의 파편들도 가득차 있으며, 그 비합리성 속에는 숱한 모순과 위태로움이 내재해있다. 마치 인간의 삶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그 풀잎들은 아름답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아모르 파티’를 노래하면서 말이다.

 

 

 

 

이응노미술관 지역작가 전시사업 _조동진

별과 윤슬처럼 빛나는 화면

 

허나영(이응노 연구소 연구위원)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빛’이다. 적어도 아직은 빛보다 빠른 물질을 발견하지 못했다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볼 수 있는 것 역시 ‘빛’ 덕분이다. 지구에 와 닿는 태양 빛, 저 먼 우주 어딘가에서 빛나는 별빛, 그리고 전기와 촛불 등 인공의 빛도 있다. 이 빛들은 세상 만물에 가 닿고 통과하고 반사되기도 하면서 여기저기로 퍼진다. 그러면서 우리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반대로 반사되어 다른 이에게 가 닿기도 한다. 비록 빛의 움직임을 볼 수는 없지만, 빛이 닿는 표면의 반사로 우리는 만물을 지각하고 느낀다. 

 

자연의 빛을 담기 위한 노력

오래전부터 인간은 아름다운 자연, 사랑하는 사람, 예쁜 꽃과 과일을 바라보면서 그 빛을 담고자 했다. 그렇지만 쉽사리 그 빛을 담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이를 안아주거나 산들바람을 느끼고 꽃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 사물들 사이를 오고 가는 빛들의 향연을 간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림을 그렸다.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를 하고 자연에 가까운 색을 사용했다. 그러다 사진술이 발달하면서 빛 그림자를 종이에 인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인간이 느끼는 눈 부신 빛은 담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인상주의자들은 형태를 포기하더라도 최대한 자연에서 느낄 수 있는 색을 담고자 노력을 했다. 이후 동영상이 나오고 디지털 영상이 개발되면서, 빛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고민을 조동진 역시 했다.

대전과 통영을 오고 가면서 작업을 하는 조동진은, 산에서 산책을 하거나 바다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빛을 화폭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햇빛이 파도 위에서 부서지면서 반짝이는 윤슬, 물 표면 위에서 드문드문 빛나는 별빛, 울창한 숲속 나뭇가지 사이로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 그리고 땅 위에 드리워진 나뭇잎 그림자처럼, 자연에서 만나게 되는 눈부신 빛들을 화면에 담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찾은 재료가 ‘글리터 가루(Glitter Powder)’였다.

어찌 보면 자연과는 너무나 먼 재료이고 전통적인 회화 재료도 아니기에 낯설기도 하다. 그렇기에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빛의 색감을 내기 위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 끝에 글리터 가루를 여러 층으로 켜켜이 쌓아 올려 만들면서 자신만의 방식을 찾으며, 결국 인공이 아닌 자연에 가까운 색으로 화면을 채우게 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조동진의 화폭에는 글리터 가루가 가지는 특성으로 인해 실제로 빛이 반사된다. 그렇기에 자연에서 느끼던 눈 부신 햇살과 윤슬을 작품을 통해서도 실제로 느낄 수 있는 듯한 효과를 준다. 물감으로 빛이 있는 것과 같이 보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반사하는 빛을 관객이 직접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조동진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연의 빛을 담았다. 

 

빛을 통해 가는 낙원

새벽녘 먼바다에 해가 떠오르면 햇살이 바다 위를 색을 칠하듯 지나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맑은 날 산책을 하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거리는 나뭇잎과 가지 사이로 빛이 눈부시게 내려와 우리를 감싼다. 이렇게 빛은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감싸고 안아준다. 그럴 때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정, 그리고 여전히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있음을 감사하게 되곤 한다. 조동진 역시 일상에서 마주하고 느꼈던 아름다운 빛과 그 감각에 주목했다. “숲의 공기엔 묘한 기운이 나를 차분하게 보듬고 달래주며 내 심장의 고동이 잠잠하게 잦아들 때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사이로 빛들이 나를 반기는 듯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고 그 느낌을 회상한다. 살아가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난 속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크고 작은 긴장과 불안을 느끼곤 한다. 그럴 때 우연히 나뭇잎 사이를 바람과 함께 내려와 마치 어루만지는 듯한 빛을 만날 수 있다. 그 빛은 고개를 들어 나뭇잎 사이에서 보이기도 하지만, 얼굴과 손의 살갗을 어루만지면서 위로를 해주기도 한다. 그러한 순간 조동진은 세상의 시름으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그래서 그 감정을 작품을 보는 이들이 자신과 같이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한편으로는 자연에서 마주하는 빛들의 반짝임, 그것은 찰나일 뿐이다. 우리가 눈부신 순간, 파도에 빛이 닿아 반짝이는 순간, 그리고 별이 깜박이는 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빛은 그 존재를 드러낸 후에는 점멸한다. 그러한 모습은 마치 생명과도 같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반드시 있는 유한한 생명 말이다. 그렇지만 죽음이 끝은 아니다. 봄에 꽃이 피고 가을에 열매를 맺은 후 시들어버려도, 겨울을 무사히 보낸 후 봄에 다시 싹을 틔운다. 그렇듯 자연에서 연유한 빛은 생명의 순환과도 같다. 인공의 빛과 같이 하나의 방향이나 일정한 강도가 아닌, 바람, 공기, 수분, 새와 나비 등 수많은 요인에 의해서 빛은 끊임없이 다르게 우리에게 와 닿는다. 

자연의 빛에 대한 꾸준한 사색을 통해 조동진은 자신만의 ‘낙원’을 찾았다고 한다. 그가 생각한 낙원은 “존재의 모두가 시간과 장소에 구애 없이 눈부심이 가득한 곳”이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2019)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조동진이 빛 속에서 찾았고 그림으로 그린 빛은, 이렇듯 오늘을 잘 살아낸 모든 이들이 가진 눈부신 낙원인 것이다.

낙원과도 같은 숲과 바다의 빛을 바라보며, 조동진은 별을 떠올리기도 했다. 파도 끝에 맺히는 윤슬의 빛이나 나뭇잎들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마치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별과 같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이 하나의 기억이자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윤동주(1917-1945) 시인의 <별 헤는 밤>(1941)에서처럼 말이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 유학 시절, 고향의 어머니와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별에 담았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라 읊조리듯, 밤하늘에서 빛나는 헤아릴 수없이 많은 별은 시인이 그리워하는 대상이자 그에 대한 기억인 것이다. 

조동진이 하나의 기억, 한명의 사람과 같은 작은 빛들이 모여, 서로 어우러지며 반짝이는 낙원, 그곳은 사실 그다지 특별한 장소는 아니다. 어디에서나 볼 법한 산책로이기도 하고, 집 근처에서 볼 수 있는 강이나 가족과 놀러 가서 봤던 바다이기도 하다. 이렇듯 평범하고 화려할 것도 없는 일상의 공간이지만, 조동진은 그곳에서 발견한 빛을 통해 더 없이 눈이 부신 낙원으로 만들었다. 반대로 낙원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언제나 바라보게 되는 빛 속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빛에 담긴 위로

강렬한 한낮의 햇살도, 무대 위 가수를 비추는 조명도 좋지만,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반짝이고 있는 별을 보면 왠지 모를 따듯한 정감이 느껴진다. 강렬한 태양은 감히 바라볼 수 없지만, 별은 그저 하염없이 쳐다볼 수 있다. 바다와 호수의 표면에 잔잔히 반짝이는 윤슬도 마찬가지다. 숨 쉬듯 그저 물 표면 위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윤슬은 그 자체로 위로를 준다. 저 빛이 그 자체로 반짝이고 움직이듯, 우리도 그저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공기 좋은 산을 오르거나 바람이 시원한 바다를 바라보듯, 조동진의 작품 속에서 우리의 일상이 가진 의미와 가치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눈이 부신 오늘 하루에 대한 감사를 느끼며 빛에게 위로 받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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