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Project
불안으로부터의 탈주 혹은 현재를 살지 말자는 말의 역설
고충환(미술비평)
나는 늘 시달렸다. 무언갈 해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생산해야 하고, 노동해야만 했다.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왜 노동해야만 했는가(그리고 해야만 하는가). 노동해야만 한다는 자기강박이 없었더라면 불안하지도 시달리지도 미치지도 않을 것을. 그러나 이런 속 편한 생각이 섣부른 결론일 수는 없다. 노동은 인간의 본질이고 삶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술노동의 특수성에 있고, 무용한 노동의 희귀성에 있다. 모든 노동은 목적 지향적이다. 목적이 주어지고, 수행(방법)이 주어지고, 보상이 주어진다. 전제된 틀을 받아들이고 수행하면 된다. 그러나 예술노동은? 목적도 열려있고(아예 목적이 없다고, 그러므로 예술은 목적 지향적이지 않다고 해도 좋다), 수행(방법)도 열려있고, 보상마저 열려있다(움베르토 에코는 열린 의미에 예술의 특수성이 있다고 했다). 전제도 없고, 지침도 없는,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사례조차 없는(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예술이 재현 불가능한, 매번 매 순간 일회적인 사건이라고 했다) 노동이기에 예술노동은 신성하다. 노동 없이 살아가기를 수행(형식실험)하는 노동이기에 신성하다. 세워진 노동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우는 노동이기에 숭고하다.
여기에 하얀 노동이 있다. 무용해서 신성하고 숭고한 노동이 있다. 작가가 하는 일 중 가장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 태피스트리 짜기이다. 큰 걸 짜는 데 7시간이 걸리고, 작은 걸 짜는 데 3시간이 소요되는 일이다. 혹자는 태피스트리는 여하튼 하다못해 차 깔개로도 쓸 수 있지 않으냐고, 그래서 무용한 노동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작가의 노동이 쓰임새 있는 노동, 목적 지향적인 노동이 되고, 그러므로 예술노동의 특수성을 부정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러므로 하얀 태피스트리 조각들은 쓰임새 없는 노동, 목적이 없는 노동을 증명하는, 그래서 무용한 노동, 예술노동의 증거로 간주 되어야 한다.
태피스트리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여기에 좀 더 본격적인 태피스트리가 있다. 작가가 어릴 때 외할머니는 TV가 바보상자라고 했다. 아마도 그 말끝에 TV 볼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공부나 좀 하라는, 좀 더 생산적인 일(그러므로 목적 지향적인 일)을 하라는 주문이 생략돼 있을 것이다. 그리고 코비드 19를 맞았고 봉쇄령이 떨어졌다. 꼼짝없이 작업실에 갇히는 신세가 된 작가는 이참에 평소에는 잘 보지도 않던 TV나 좀 볼까 했다. 그런데, 할머니의 말(질책)이 자석처럼 떠올랐다. 그래서 작가는 자구책을 찾아냈다. TV를 보면서, 동시에 태피스트리를 짜기로 했다. 할머니가 보기에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었고, 작가는 작가대로 TV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양심에 가책 없이, 죄의식도 없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므로 태피스트리 짜기는 할머니가 보기에 생산적인 일이지만, 작가에게는 무용한 일(그러므로 예술노동의 특수성과도 통하는)을 하기 위한 구실일 수 있다. 무용한 일과 유용한 일, 생산적인 일과 비생산적인 일의 차이에 대해서, 그래서 예술노동의 특수성에 대해서 말해주는 에피소드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에게 태피스트리 짜기는 노동해야 한다는, 노동에 대한 자기강박과 불안으로부터 도망가게 해주는 구실이고 계기였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작업(그러므로 무용한 노동)이 막힐 때마다 태피스트리 짜기로 도망갔을 것이고, 그래도 여하튼 그 순간만큼은 뭐라도 하고 있다는 자족감으로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노동을 통해서 노동으로부터 탈주한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여하튼 사람을 도구로 만들어 소외시키는 노동 그러므로 도구화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현실에 삶의 부조리가 있고, 무용한 노동과 유용한 노동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데 예술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현재 그 불분명한 경계를 분명하게 만드는 중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는 도구적인 노동의 현실로부터 예술로 탈주한다. 그리고 그 탈주는 때로 과거를 향하고, 더러 오지도 않은 미래를 향한다. 과거로 치자면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것, 그리고 좀 더 먼 경우로는 유년 시절의 추억을 되불러오는(작가가 과거에 잠기는 일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나타나고, 미래로 치자면 예술과 비예술의 차이를 분명하게 해줄 불분명한 경계를 더듬어 찾아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어쩌면 회고적이고 과거지향적인 경우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현실에서 예시되고 있지만, 미래의 경우에는 현재 목하 실험 중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는 프랑스 유학 10년 동안 총 아홉 번 이사를 했다. 매번 이사할 때마다 물건들을 버렸지만, 끝까지 살아남은 물건들이 있었다. 옷, 성경책, 미술 재료, 작품, 레퍼런스 북 같은 일상적인 물건들이고 애틋한 물건들이다. 얼핏 짐스러운 물건들이지만, 버릴 수 없었던 물건들이다. 이 물건들 하나하나를 작가는 랩으로 고이 쌌다. 작가의 고백처럼 집착과 소유와 자본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고(비 혹은 반경제적인, 그래서 경제적 가치를 재고하게 만드는 조르주 바타이유의 잉여?), 초현실주의에 연유한, 그 자체로는 무용하지만 어떤 시상을 불러일으키는 시적 오브제(앙드레 브르통)일 수도 있겠고, 자신의 취향을 반영한 작은 미술관(분더카머)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작가와 호흡을 같이한, 작가의 숨결이 배어있는, 작가의 또 다른 분신과도 같은, 죽은 사물들에 바치는 오마주일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염을 하듯 죽은 사물들을 랩으로 고이 싸서 예의를 표시한 것이다.
그 이전에 작가는 스카치테이프, 실, 노트, 다이어리와 같은 일상적인 물건들을 소재로 트로피를 만들어 자축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만큼 매번 똑같은 계획을 반복했는데, 매일 똑같은 스케줄을 쓰고 있었던 2년간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자신의 헛된 노력에 바치는, 헛된 강박에 바치는, 그러므로 무용한 노동에 바치는 오마주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귀국 이후에는 화분들이며 화초들이 이런 취향의, 제의의, 오마주의 대상이 된다. 작가의 사사로운 개인사로부터, 그리고 생활사로부터 추상 된 작업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의 실존적 조건이 움직이는 만큼, 미술관(앙드레 말로의 상상의 미술관)의 콘텐츠가 바뀌는 만큼 향후 또 다른 대상을 찾아 옮겨갈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프랑스 유학 중 일시 귀국했을 때 그동안 집(교회)이 변한 것을 알게 된다. 아마도 흙 마당이었을 정원이 콘크리트 정원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작가는 콘크리트로 건물의 구조물이 바뀌던 시절에 대한 어렴풋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고, 그 기억을 공간설치작업으로 풀어냈다. 그러므로 어쩌면 향수를 소환하고 기억을 호출하는, 존재의 원형 혹은 원형적 자기를 되불러오는 작업일 수 있겠다. 여기서 원형은 전형보다 깊다. 사회적 합의에 이른 기호, 공적인 기호(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가 전형이라고 한다면, 원형은 사사로운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기억과 상처가, 그리고 위로가, 그러므로 치유가 무분별하게 몸을 섞고 있는(푼크툼?) 무의식의 지층에 속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쩌면 그 무의식의 방을 재현하고 있을 수 있다. 안온한 느낌의 그 방에는 뜯긴 벽지와 함께 창을 통해 들어온 빛 조각이 면을 그리며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빨랫줄과 함께, 빨간 고무 물통에 텍스트들이 둥둥 떠다닌다. 아마도 회고적인 텍스트들이며 회향적인 텍스트(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일 것이다. 여기서 물은 무의식을 상징한다. 과거로 건너가는 관문이라고 해도 좋다. 마치 유년 시절 그랬던 것처럼, 그 물속에 작가는 잠긴다. 그리고 텍스트를 읽는다. 재생을 위한 의례라고 해도 좋고, 거듭나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해도 좋다. 아득한 자기, 잊힌 자기, 그러므로 어쩌면 상실한 자기(자기_타자)와 대면하는 계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노동을 해야 한다는, 무용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무용해서 유용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자기강박과 불안으로부터 탈주를 감행한다. 잃어버린 과거로, 그리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향해.